새로운 길
마테호른, 그리고 체르마트 맛집
11mn
2017. 8. 17. 15:33
혼자 떠난 스위스 여행 7일차
##1. Hotel 댈라빡을 떠나며
아마도 난 영원히 이 호텔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할 것이다. 물론 별로 알 필요도 없다.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웃기고 즐거운 모습 그대로 기억에 남겨 둘 예정이다. 댈라빡 이라니. 어제 폭풍속 물길을 걷는 예수가 되어 First를 다녀오고 빨래를 좀 하고 싶었다. 그런데 저녁 8:30이후엔 빨래를 못한다며 전에 있던, 거 누구냐 아이언맨 여자친구 아 그래. 기네스 펠트로 닮은 카운터 누나는 어디가고, 스릴러 영화에서 제일 먼저 사망할것같은 어떤 아줌마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이때 호텔 델라빡의 이미지가 좀 저하됐다. 오늘 아침에 일어 났을땐, 나의 인터라켄 여행에 성심성의껏 도움을 주었던 기네스 펠트로에게 정말 고맙다며 따듯한 인사와 함께 아름다운 체크아웃을 하고 싶었는데, 이 아줌마 아직도 안죽었다.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며 체크아웃을 하는데 예상했던 비용 286CHF에 텍스가 붙어서 300CHF란다. 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내가 이 스릴러 영화의 범인있것 같다. 즉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가방에 꼭꼭 숨겨둔 돈봉투에서 돈을 꺼낸다.
그렇게 돈을 건내는데, fnskxoeneko가 나에게 전달해달라고 했다며 큰 초콜렛을 건낸다. 갑자기 울컥했다. 기네스 펠트로. 그녀는 어디로 갔단 말이오. 그냥 쉬는 날이란다. 언제 오냐니까 쉬는날이란다. 아 그치 쉬는날은 안오지. 꼭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잘 쉬었냐고 물어보길래, 환타스틱 어메이징 했고, 특이 아침식사는 뷰티풀 골져스라고 했다. 내가 아는 형용사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가방에 초콜릿을 꽂아 넣고 Interlaken west역으로 향했다. 날씨는 왜그리 맑던지. 아무래도 난 이 스릴러의 주요 범인은 아닌것 같다. 체르마트도 기대된다.
##2. 소비에 대한 상대적 효용성
만약 내가 많은 돈을 모아서 스위스에 와서 살게 된다면 어떨까에 대한 상상을 했다. '많은'이라는 모호한 양의 돈을 준비 한 다음 스위스에 와서 '적절한' 집을 구입 한 다음 '즐거운' 삶을 살고자 하는 목적이다. 문제는 이 모호한 양의 표현에 있다. 가령 나의 자산이 수천억이라고 했을때, 난 스위스에 와서 그 엄청난 자산에 걸맞는 집을 구입 할 것이다. 그리고 내 전체 자산에서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한 내 사랑스러운 집을 위해, 정원을 가꾸고 인테리어를 고민하고 벽에 걸 그림을 찾아 다니며 정성과 에너지를 쏟아 부을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집을 꾸미다 보면 어느날 그 집의 아쉬운 부분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컨데 집이 오래되어 생활하수의 배수가 잘 안된다던지, 해가 너무 잘드는 나머지 내부의 페인팅이 금방 바래진다던지 하는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것에 대해 아쉬워 하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난 이 집에 대해 충분히 많은 비용을 지불했고, 이런 부분 또한 놓칠 수 없는 '스위스의 감성' 이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을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5억 정도 되는 집을 사게 되면 어떨까? 일단 수천억의 자산을 가진 상태에서 5억의 집을 구입하게 되는것 자체가 넌센스 이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화장실 물이라도 넘치는 날엔 당장 분노가 치솟을 것이다. 넓은 정원은 정원사를 고용해서 멋지게 꾸미긴 하겠지만, 그 흥미 자체는 금방 떨어질 것이다. 정원에 어떤 꽃이 피었는지, 수영장에 낀 물때는 당장 피부암을 유발할것 같이 더러워서 만약 강도라도 든다면 저기에 밀어 넣으면 깔끔히 해결되겠다고 생각 할 것이다.
난 수천억의 자산가가 아니다. 자산가는 무슨 개뿔 햄버거 하나도 못사먹어서 덜덜 떤다. 하지만 나 또한 내가 지불 할 수 있는 한, 최대 가치를 얻기위해 소비를 하고, 그것에 대해 최대한 많은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가 어느날 수천억의 자산가가 된다고 하더라도 나의 인생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작년에 목성에 다녀왔으면서 또 올해는 화성에 가고싶을 것이다. 화성의 모래폭풍이 그렇게 멋진데, 우주복 입고 그 폭풍의 눈을 거닐으면 엘사 마냥 레릿고를 절로 흥얼거리게 된다며 흥분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모님이 자주 말씀하시던 '돈은 원래 항상 부족한 것이다. 그게 돈의 정의 이다.' 라는 말이 떠오른다. 아무리 되새겨도 정말 명언이다. 어차피 돈은 있다가도 없는것. 돈이 있어도, 돈이 없어도 삶을 바라보는 모습은 나의 시야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니 난 어제 꿈에 비욘세와 제이지가 나와도, 내 발에 누가 똥을 뭍히고 달아나도 쓸데없이 로또를 살 필요가 없다. 그렇게 은행만 쫓아 다니며 내 스위스 여행을 망치고 싶진 않으니.
##3. 절대적 미적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과연 상대적인 가치일까? 아니면 절대적인 가치일까? 무엇이 정답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보편적인 아름다움, 즉 아름다움의 절대적 가치는 분명 존재한다고 느낄때가 있다. 오늘 오전이 그랬다. Interlaken에서 Zermatt로 이동하는 기차를 타고 오던 중이었다. 맥주를 두켄째 들이키던 수염난 할아버지 앞에 앉아서 살짝 졸다보니 할아버지가 사라졌다. 마침 기차가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어서 진행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앉아있던 나는 할아버지가 앉아있던 자리로 위치를 옮겼다. 그리고 나도모르게 스르륵 감기는 눈을 그냥 그러려니 내버려 두고 있던 찰라, 저 앞에서 한 가족이 와서 스르륵 앉는다.
귀여운 딸래미를 둔 가족이었다. 문제는 이 귀여운 딸래미가 아주 심각하게 귀여웠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귀여움은 절대적 미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형용사이다. 왜냐하면 귀여움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 보단 어떤 행동이나 추임새등 의도된 형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녀는 귀엽다기 보단 아름다웠다. 짧은 다리로 내 무릅을 자꾸 건드리길래 일부러 괜찮다는 척 하며 얼굴을 바라보고 찡긋 웃었다. 수줍어 하는 듯 했다. 그리고 난 나도모르게 계속 꼬맹이를 바라보며 생김새를 곰곰히 관찰했다. 눈과 코의 비율. 삐죽거리는 입. 햇살에 반사되는 갈색빛이, 생전 시커먼 털만 뿜어내던 나라는 생물에 비하면 훨씬 신비로워 보였다. 이 꼬맹이의 아름다움은 뭔가 혼자보기 아쉬웠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꼬맹이와 함께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빠박이 아빠랑 같이 사진을 한번 찍는 다며 부녀지간의 사진을 찍을까? 초상권 팔리기가 싫어서 싫다고 하려나? 그러면 내가 저 꼬맹이랑 둘이 찍어도 되겠냐고, 꼬맹이의 주인에게 물어볼까? 꼬맹이가 울어버리면 어쩌지? 그럼 나도 상처받아서 하루종일 나도 울어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쉽지않은 고민을 하다보니 20여분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나의 목표 지점인 Zermatt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이러다가 도착 해버리면 나중에 후회 할 것 같았다. 삶은 살아가면서 가장 의미없는 감정이 '후회'아닌가? 이런 쓰레기 같은 감정이 나의 인생에 젖어들어 나의 남은 여생을 고통과 괴로움 속에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 용기를 내자. 저기.. 딸래미가 너무 귀여워서 그러는데 셀카로 당신 가족이랑 같이 사진을 한장 찍어도 될까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빠박이 아빠가 흔쾌히 좋다고 했다. 몰랐는데, 내 옆에 앉은 꼬맹이의 엄마도 아주 인상이 좋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본 꼬맹이의 극단적인 아름다움은 이 모자라는 현대 기술로는 담아 낼 수가 없었다. 이런 멍청한 아이폰. 당장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이성을 되찾고, Zermatt에 도착하면 숙소가 어느 방향인지에 대해 다시한번 구글 지도를 켰다. 그러던 중 빠박이 아빠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자기 폰이 조금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Zermatt기차역에서 자기 숙소까지 어떤 길로 가면 되는지 혹시 알아봐 줄 수 있냐고 했다. 물론 난 원한다면 숙소까지 데려다 줄수도 있는 마음이었다. 따라서 최선을 다해서 그들의 숙소의 위치와 거기까지 가는 동선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름도 아직 안까먹었다 Hotel Solvey. 로비에 가서 그 가족을 찾아달라고 애걸복걸 한 다음 꼬맹이를 꼬셔서 놀이터에가자고 꼬셔볼까? 저기 내가 잘 아는 스위스식 그네와 미끄럼틀이 있는데 너가 원한다면 내가 두팔이 으스러질때까지 밀어주겠다고? 아니다. 빠박이 아빠가 날 없애버릴지도 모른다. 그냥 아빠도 무서운데 빠박이 아빠라니. 그냥 포기하자.
##4. Hotel Carina
심한 내적갈등을 겪다보니 어느덧 Zermatt에 도착했다. 난 단숨에 내 숙소의 위치를 파악하고 큰걸음으로 숙소를 향해 나아갔다. 유독 오늘 서둘렀던 이유는, 오후 1시부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고, 오전 내에 Gornergrat투어를 마치려면 서둘러야 했다. 역에서 부터 숙소까지는 약 700미터 정도 되는것 같았다. 생각보다 마을이 너무 예뻐서 좀 더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이러다간 마테호른을 못볼수도 있었다. 열심히 달려와 체크인을 마쳤다. 이런 내방에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다. 이게 말이 되는가? 갑자기 기분이 확 좋아졌다. 내방에 샤워실과 화장실이라니. 뭔가 과한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행복의 상대성인가. 즐거움은 잠시 접어두고 백팩을 매고 뛰어 나왔다.
##5. Gornergrat (Matterhorn)
영화 시작할때 보면 가끔 웬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나오면서 Paramount pictures라고 나올 때가 있다. 이것이 Matterhorn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뭐 사실이 아닌걸로 알려졌다. 하지만 뭐 자태가 그와 비슷하다. 간당간당하게 10:48차를 10:46에 표를 끊고 겨우 탔다. 앞에 앉은 한 할아버지가 손녀딸을 데리고 놀러온 것 같은데, 표파는 아줌마와 세상 정세에 대해 떠드는것 같다. 물론 독일어인것 같아서 난 알수가 없다. 이러다간 저 차를 못탈것 같았다. 그려면 이번 스위스 여행에서 Matterhorn는 못볼 것 같았다. 하지만 극적으로 표를 끊었고, 착석까지 성공했다. 그리고 칙칙폭폭 마테호른을 향해 기차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산을 오르는 기차에 대한 감동은 사실 Pilatus에서 1차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기차의 창 밖으로 Matterhorn이 보이기 시작했다. 뭔가 툭 튀어나온 산 봉우리 인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치 저것 또한 절대적 미적 기준으로 봤을때, '아름답다'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것이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사실 기차나 버스 안에서 창 밖에 보이는 사물에 대해 사진을 잘 찍는 편은 아니다. 왜냐하면 창문 자체에 되어있는 코팅 때문에 차 내부의 사물이 반사되어보이기도 하고, 어차피 내리면 잘 보일텐데 이렇게 차속에서 난리치는게 크게 의미 없다고 느끼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혹시나 위에 올라가면, 지금은 잘 보이는 저 마테호른을 보기가 어려울것도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행동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잘한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명치까지 푹 눌러 쓴 구름모자 덕에 이후 마테호른의 얼굴은 한번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6. 관광지의 공통점
Gornergrat은 Jungfraujoch와 약간 비슷한 느낌이었다. 만년설이 쌓인 산과, 그 앞에서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사람들. 딱 그런 느낌이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내가 좋아하는곳은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무언가를 깨닿게 해주는 곳이라는 것을. 즉 새로운 것을 깨닿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내가 나의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라는 것을. 어쩌면 너무도 일찍이 알았던 것이지만, 과연 내가 한 가정이 맞는 것인가에 대해 지속적인 검증의 시간이 필요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알고있다. 깨달음. 그것이 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난 계속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고 새로운 것을 느끼며 다시 나아가고, 다시 더 깊고 새로운 깨달음을 깨닿고 이러한 행동을 반복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내 삶에 변화는 필수 적이고, 난 항상 변화를 지향하는 쪽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세상엔 너무도 다양하고 많은 경험들이 널려있고, 내 인생은 그리 길지 않으니, 평생 그런 새로운 경험을 쌓아 나간다 하더라도, 더이상 나에게 깨달음을 줄 새로운 경험이 없어서 슬퍼하고 지루해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역시 난 오늘도 트래킹을 하며 주변 구경을 하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7. 트래킹
이번 여행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나의 체력이 이젠 보통이상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체력과 운동은 나와 거리가 먼 가치였는데, 이젠 체력적인 부분에 한해선 그 어뗜 면에서도 보통이상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3년간 노력해온 시간들이 결코 헛된 시간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단순한 반복과 시간을 통해서 얻게된 가치가 이렇게 크다니. 뭐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세상의 어떤것들도 별로 어려워보이지가 않는다. 그냥 뭐 좋은 결과가 있을것이란 믿음으로 꾸준히 하다보면 결국 뭐든 이뤄지는듯 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가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는가 이다. 물론 그 선택 또한 너무 심사숙고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본능적으로 재미없거나 의미가 없다고 생각대는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가치있게 보여도 절대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데 새로 알게 된 친구가 반얀트리에서 핫한 풀파티를 한다고, 거기가면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돈도 낼 필요 없고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된다고 했을때, 역시 난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뭐 그래봤자 돈에 환장한 어리고 예쁘장 한 애들 헐벗고 물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을 것이고, 변비를 참아가며 지난 몇달간 역겨운 단백질 보충제를 먹어서 만든 울퉁불퉁한 근육질들은 잔뜩 전신에 힘을 주고 있을테니 말이다. 기껏 아무리 잘 풀려봐야 그들과 그들이 눈맞아 술에 떡이 된 채로 다음날 아침을 맞이 할텐데, 설령 그곳에 반이 레이챌 맥아담스거나 마고로비가 나온다면 모를까.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위의 가정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어쩌다가 내 트래킹이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까지 이어진지는 모르겠다만, 이젠 이정도의 트래킹은 편안하게 뒷마당에 토마토 따러 가듯이 할 수 있다.
##8. Browncow
다시 마을에 돌아와서 내일 방문할 Sunnegga에 어떻게 가는지 루트를 확인 한 다음, 숙소에 돌아왔다. 그리고 어제 예수를 따라하며 물속을 걷다가 발생한 젖은 옷들을 세탁하기 위해 세탁기를 쓰고싶다고 호텔에 요구했다. 그러나 세탁기가 고장이란다. 아.. 뭐 그래 고장 날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직원이 너무 미안해 하면서 인터넷을 엄청 뒤지며 세탁소를 찾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대는데, 결국 알아 낸 곳은 빨래를 맡기고 12시간이 지나야 찾을수 있단다. 머리를 빨빨빨 굴려보니 어차피 지금 입고있는 옷의 상의만 손빨래를 하면 내일 활동을 하는것엔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세탁기는 됐고 점심이나 맛있게 먹을만한 장소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갈등없이 '황소네'를 알려 준다.
스위스의 산을 걸으면서 느낀것은, 꽤나 그 식물의 형태가 한국과 비슷하단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와 위도가 비슷해서 그런가보다. 혹시나 해서 구글지도를 보니 스위스가 우리나라보다 더 위다. 아무래도 위도랑은 크게 상관이 없나보다. 여하튼 Browncow라면 누가봐도 이건 황소다. 더군다나 호텔에서 한치의 갈등없이 여길 추천해준것 보면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친절히 메인거리가 아닌 뒷골목을 알려준다. 그쪽길이 더 좋단다. 세탁기가 고장난게 꽤나 맘에 걸렸나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을 보니 그 정성이 느껴진다. 난 고맙다고 하며 다시 호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 며칠간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냇가에 물이 엄청나게 출렁인다. 저기에 무언가 빠뜨리면 절대로 못찾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빛깔이 희멀건게 다 녹은 밀크쉐이크 같다. 다 녹은 밀크쉐이크를 믹서기에 넣어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면 딱 저 모습일 것 같다. 그러던 중 앞에 어떤 차가 지~잉 하며 지나간다.
Zermatt에서는 공기의 오염을 발생시키는 그 어떤 교통수단도 사용 할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전기차와 마차만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인드인가. 그래 여기다. 공기고 나발이고 남들에게 자기가 큰배기량의 차를 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만 미쳐서 50미터마다 멈춰서 신호등을 기다려야하는 도시에서는 그만 떠나야 겠다. 50미터를 빨리 가기 위해 6300cc엔진을 으르렁 거리며 남들보다 5초 빨리 맞은편 신호등에 도착하는게 대체 무슨 가치란 말인가. 각종 조미료 범벅을 해서 음식을 양산 해 내면 더 싼 가격으로 더 구미를 당기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건강을 해치고 그것이 자연을 해친다기에 기꺼히 재료 고유의 맛을 느끼며 맛없는 식단을 선택하는 사람들. 지구상 가장 GDP가 높은 나라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며 산다는것이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더 많은 물질적 가치를 추구했기에 더 부유한 나라가 되었을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들이 추구한 것은 물질적 가치가 아니라 세상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갖춰야 하는 모습 그대로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 이들이 지향하는 가치인 것 같다.
일단 10억을 모으려면 그 거짓부렁이 사회와 회사에서 나의 금쪽같은 젊음과 시간을 더 낭비해야 하니, 일단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아 그래. 햄버거를 먹으러 왔었지. 가계에 당도한 다음 적당한 자리를 찾다가 Bar에 앉았다. 내부 인테리어가 중세의 주막 같은 느낌이다. 주모. 여기 햄버가가 맛있다고 들었는데 거 추천좀 하나 해봐주시오. 호호 우리 가계의 햄버거는 모두 맛있답니다. 하지만 Zermatt버거를 추천 해 드리지요. 오 Zermatt버거라. 내 오늘 이곳에 처음 발걸음을 옮겼으니, 내 오늘은 그것으로 해보리다. 좋은 선택입니다. 마실것은 뭘로 드릴까요? 거 맛나는 생맥주 한잔 했으면 좋겠는데, 뭐 좋은게 있소? 호호 까디날가 이곳에서 유명한 맥주지요. 이것으로 드릴까요? 오 까디날이라. 좋소 그걸로 주시오.
왼쪽위의 티비를 보니 사이클 경기가 한창이다. 거리가 185km란다. 강동구청에서 여의도를 왕복하면 40km가 조금 안되니, 결국 우리집에서 여의도 까지 4번을 왕복하고, 여의도에 다시가서 포카리를 마셔야 하는 거리다. 잠시 경기를 감상하다보니 참 재미있는 장면이 많다. 어떤 선수는 신나게 가다가 목이 말랐는지 뒷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다가 놓쳐서 날아가버렸다. 카메라는 또 그걸 놓치지 않고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준다.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남들은 다 적당한 지점에서 젤리형태의 수분을 쫙 입에 짜 넣어서 에너지를 보충 했을텐데, 이 사람은 이대로 패닉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웃긴 관경이 펼쳐 진다. 일종의 반환점 같은곳을 지나가는데 에코백 같은 가방을 지나가는 선수들에게 건내고 있다. 갈매기가 새우깡을 낚애채듯 그 에코백을 낚아 챈 선수들은 크로스백 처럼 어께에 가방을 맨다. 그리고 그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먹는다. 결국엔 저렇게도 에너지를 섭취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자전거 타는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185km를 타면 다른건 몰라도, 엉덩이 뼈가 가루가 될 것 같아서 그닥 시도해보고 싶지 않아진다.
그러던 중 문제의 Zermatt버거가 나왔다. 내 기억엔 이 버거의 가격은 약 20CHF였다. 물론 싼 가격은 아니다. 하지만 스위스에서 이정도 가성비를 보여주는 음식은 처음본다. 호텔에서 추천한 이유가 있었다. 꽤나 양이 많아 보였지만, 어차피 저녁은 안먹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남기지 않고 먹기 시작한다. 하루에 두끼를 먹는 인생을 시작한지 6달 정도가 되었는데, 이것이 이젠 나름 적응이 되어 저녁이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다. 얼마나 좋은가, 덕분에 난 보통 사람들과 함께 조난이 된다면 밥을 2/3만 먹어도 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생존 확률이 높을 것이다. 뭔가 뿌듯해진다.
##9. Zermatt
식사를 마치고 마을을 걷기 시작했다. 마을의 형태과 느껴지는 느낌만 보자면, 앞서 지나친 도시들 중 가장 마음에 든다. 건축 양식이나 동네의 생김새도 적당히 발전해 있고, 적당히 옛날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이곳에 산다면, 나도 호텔이나 하나 운영하며 고장난 세탁기도 고치지 않고 매일 아침 Matterhorn이나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다가 손익분기점을 넘기게 되면 다시 또 좋은곳을 돌아다니다가 정착해서 먹거리를 찾고 다시 이동하는 그런 삶을 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아직 시간이 꽤 이르다. 오후 네시밖에 안됐는데, 구경거리가 떨어져 버렸다. 이럴땐 세상을 좀 더 천천히 바라보면 나름의 재미가 있기에,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사람구경을 하기 좋은 레스토랑에 들어간다. 그리고 테라스에 앉아 까디날을 한잔 시키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맥주이다. 그리고 난 개인적으로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스위스의 일정이 끝나면 체코에 방문하게 되는데, 만약 체코에서도 맥주가 맛이 그저 그렇다면, 난 평생 맥주와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맥주와 연을 끊겠다. 잠깐 과격하고 급진적인 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옆으로 마차가 지나간다. 그러다가 마차가 선다. 마부가 내리더니 옆으로 굴러떨어진 말똥을 모종삽으로 퍼다가 치운다. 참.. 마음에 드는 곳이다.
##10. Sunnegga
나의 스위스여행 가이드를 맡고 있는 차가운 순대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니, 수네가 역시 날씨가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밤부터 앞으로 2일간 비가 온다고 되어있다. 물론 일기예보를 맹신하지는 않는다. 대체 처음에 누가 일기예보를 해보라고 부하직원을 닥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얼마나 죽을 맛이었을까. 하늘에 구름이 움직이는것을 어떻게 예측한단 말인가. 슈퍼컴퓨터를 사면 날씨 예측이 된다고? 그렇게 미래 예측이 되면 왜 날씨만 예측하는가. 딥러닝과 슈퍼컴퓨터를 이용해서 이번주 로또번호가 무엇이 될지도 한번 예측들 해 보시지. 정 안되면 알파고에게 이메일이라도 보내면 될것이 아닌가. 여튼 세상엔 답답한 사람들이 많다. 난 사실 뭐 내일 날씨가 안좋으면 어떻하지? 라는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1. 비가 온다. 2. 비가 안온다. 두가지 경우에 대한 준비만 하면 되니까.
사실 엄밀이 말하자면 경우의 수가 조금더 쪼개진다. 왜냐하면 내일은 수네가 - 로잔 - 취리히로 이동하는 일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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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온다. 그런데 로잔은 비가 안온다. 그럼 로잔에 먼저 방문한다. 그리고 베른을 구경하고 취리히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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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온다. 그런데 망할 로잔도 비가온다. 그럼 베른으로 가서 베른을 구경한다. 그리고 취리히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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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안온다. 그럼 일단 수네가를 간다. 그런데 비가오기 시작한다. 로잔을 포기하고 베른을 간다. 그리고 취리히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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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안온다. 그래서 수네가를 갔는데, 비가 아직도 안온다. 그럼 로잔을 갔다가 취리히에 간다.
베른과 취리히는 둘다 스위스의 주요 도시로써, 베른에는 아인슈타인 생가가 있고, 취리히에선 빨래를 할 수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일정인가. 비가 오던말던 내일은 즐거울 수 밖에 없다. 문 밖에서 라면 냄새가 나는 듯 하다. 내일은 이동이 많으니 얼른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