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날씨 - 비가 오면 이렇게 하자!

2017. 8. 17. 14:07새로운 길

혼자 떠난 스위스 여행 6일차

 
##1. 꿈
촉촉한 밤공기를 마시기 위해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잤다. 가볍게 반바지와 반팔을 입고 잠들었는데 이불이 너무 따듯해서 아주 편안하게 체력을 회복 할 수 있었다. 체력을 완전히 회복하고 에너지가 남아서 꿈을 좀 꾸기 시작했다. 아마 이때가 새벽 2시정도 된 것 같다. 
 
 참 재미있는 꿈이었다. 꿈 속에서 만난 이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지금 이렇게 다같이 모여서 이야기을 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이 죽음 이후의 세계라는것을 알게 됐다. 예컨데 꿈 속에서 아버지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보통 몇 분이내에 짧게나마 답을 주시던 아버지는 몇일째 답을 주지 않으시고, 방금전에 사고를 당해 몸을 잃었던 내 옆 사람은 어느새 새로운 옷을 입고 옆에 앉아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모두가 둘러앉아 나누다 보니, 이곳은 죽음 이후의 세계이며, 나의 꿈속은 결국 모든것들을 이루고 경험하며 살 수 있는 자유로운 무한의 공간이란 것을 알게 됐다. 약 20년전 처음으로 꾼 자각몽에선 가벼운 도약과 함께 꽤나 높은곳 까지 다다를 수 있었고, 다시 5년 후 수직 상승이 가능해졌다. 다시 5년 후 자유로운 비행이 가능했고, 다시 5년 후엔 멀리있는 물체를 생각으로만 이동하는게 가능했다. 그리고 바로 어제. 꿈 속의 세상이 모두 내것이란 것을 알게 됐다. 
 
 이런 꿈을 꾸고 일어났더니 아주 기분이 묘했다. 오늘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어제 봤을땐 적잖히 우울했는데, 오늘 맞이하는 비오는 아침은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가?  역시 삶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겪기 나름이다. 
 젖은 인터라켄과 융프라우는 어제 느끼지 못한 다른 경험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 버스
이곳의 버스는 구조가 특이하다. 마주보고 앉고 위에 앉고 서서 가고 뭐 놀이터같이 만들어놨다. 하지만 진짜 멋진건 바로 정류장에 정차할때다. 버스의 차체가 오른쪽으로 스윽 기울면서 보도블럭과 높이가 일치된다. 뭔가 우쭈쭈 왔어~ 얼릉타~~ 이렁느낌 이랄까. 사실 탈때는 잘 모르는데 출발할때 다시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차축이 추욱 소리를 내며 올라오면 기울어졌었단걸 알게 된다. 친절하다 이 버스들. 
 
##3. 시간 
이곳의 교통수단들은 모두 끔찍하리만큼 정확하게 시간을 지킨다. 예를들어 3:57 출발! 이라고 교통편 설명 어플이나 구글맵에 표시된다면,  정말 거의 오차없이 그 때 도착한다. 이정도로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들이라면 내 성격상 같이 일하면서 시간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을 것 같다. 
 
##4. First
여기 발음으로 읽자면 피르스트가 된다. Pilatus에서도 first를 본 것 같은데 아무래도 봉우리? 뭐 그런 뜻인가보다. 여하간 Grindelwald에 도착 한 다음 곤돌라를 타고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정말 한참을 올라간다. 이제 멍멍한 귀에 코바람을 불어서 이퀄라이징을 하는것은 익숙 해 졌다. 구름 낀 산을 보며 음.... 역시 산 할아버지는 모자를 써야 멋있군.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구름 사이로 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라이트커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연현상이다. 구름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보고 라이트커튼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말 그대로 빛의 커튼이 출렁이는 모습과 같다. 난 또 우와 우와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이리찍고 저리찍고 구도를 바꿔가며 이 멋진 관경을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도 트래킹을 시작했다. 
 
##5. Bachalpsee
바샲시? 역시 뭐라고 읽는지 모르겠다. 알파벳이면 뭐하나 읽지를 못하겠는데. 여튼 신나게 걷기 시작했다. 이곳의 트래킹은 단 한번도 빼놓지 않고 큰 감동을 줬기에 시작의 발걸음은 오늘도 가벼웠다. 어리고 꿈에도 생각치 못한 멋진 풍경을 보게 된다. 아제의 코스에 비해 어려움은 없는 편이었다. 다만 날이 흐려서 좀 쌀쌀한게 문제였다. 
 
 저벅 저벅 힘찬 걸음으로 걷다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호텔에서 빌린 호텔 델라뺙 우산을 쓰고 착착 걸어간다. 비가 좀 오면 어떠하리. 일찍 돌아간다고 해도 어차피 별 할일도 없는걸. 그래서 계속 걸어간다. 앞에 한 일본인 가족이 걸어간다. 병아리같은 여자꼬맹이 둘에게 장미 비옷을 입혔다. 상당히 디자인이 멋지다. 적당히 화려해서 눈에 잘 띄면서도 요란하진 않다. 그렇게 비옷의 디자인에 감탄하고 그들을 앞질러 간다. 헬로~ 굿모닝~ 하고 지나간다. 그럼 꼭 일본인들은 할로~ 라고 대답한다. 뭐 할로나 핼로나 여튼 인사를 주고 받는다. 한 네다섯살 되어보이는 꼬맹이들과 함께 해발 3천미터 트래킹 코스를 걷다니. 겨울에 반바지 입혀서 학교 보낼때부터 알아봤다. 나도 강하게 키워야겠다. 
 
 잡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햇볕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저 멀리 목적지가 보인다. 목적지라서 알아본게 아니라, 한눈에 목적지라고 느낄 수 밖에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맑은 호수위에 일곱빛깔이 선명한 무지개가 떠있다. 이렇게 빨주노초파남보가 선명 할 수가?! 이때는 우와 우워 감탄사를 다섯번은 연달아 뱉었다. 세상에 이런 관경이 있다니. 대체 난 지구의 어느곳에서 살고 있었단 말인가? 머리위에 맑은 구름 하나도 보기 어려운 곳에서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나 종이쪼가리에 써내려 가며 의미없는 몸짓을 이어가고 있던게 내 인생이 아니었던가. 약 2초간 분노 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다시 둘러보기 시작한다. 다시봐도 말도 안되는 장관이다. 당장 옷을 벗고 수영하고 싶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벤치가 있다. 응? 반합이 벤치에 엉켜있다. 호기심에 반합을 열어보니 노트와 펜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엔 이 멋진 호수를 보고 느낀점을 적어달라고 적혀있다. 작은 몰스킨 노트를 열어보니 세계각국의 언어로 와 정말 죽여요! 완전 멋져요!! 라고 쓴것으로 느껴지는 글들이 착착 적혀있다. 나도 몇마디 적기로 결심한다. 안그래도 지렁이같은 내 글씨는 서서 쓰다보니 갯지렁이 같다. 그런들 어떠하리. 한국말은 원래 그런지 알겠지. 너무 멋지다고 몇마디 적어두고 다시 길을 돌아가기 시작한다. 뒤로 보이는 길은 아주 먼 트래킹 코스인데 잘못하면 오늘은 노숙을 해야할것 같은 수준이라 깔끔하게 포기한다. 그리고 포기하길 잘했다. 
 
 저 멀리 호수 반대편에 정신나간 한국인 두명이 수영을 하는데, 내 뒤로 악의 기운이 세상을 뒤덮듯 검은 구름이 실시간으로 몰려온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날씨가 엄청나게 추워졌다. 난 얼른 유니클로 패딩을 꺼내입는다. 다시 길을 돌아가려고 하던 차에 옆에 작은 방공호 같은곳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잠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앉아있는 듯 하다. 나도 재미삼아 들어가 본다. 그리고 아침에 챙겨온 견과류 쪼꼬바를 꺼내 문다. 진짜 이 쪼꼬바는 스위스에서 돈주고 사먹은것들 중 가장 가성비가 좋은 식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6개 셋트가 한 6천원 하던가? 6천원이라고 생각하니 별로 안싼것 같다. 밖을 다시 보니 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날씨 어플을 보면, 이후의 시간은 100%비가 온다고 되어있다. 이 높은곳에서 폭우가 그칠때까지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조난의 위험이 있다고 생각됐다. 그리고 과감히 우산을 엎고 하산을 시작했다. 
 
##6. God in the rain
폭우속을 걸어가다보면 브이 포 벤데타에 나오는 명장면이 꼭 떠오른다. 나탈리포트만이 번개치는 밤하늘을 보며 두손을 들고 민머리에 물길이 쏟아지는 장면이다. 갑자기 넬의 유령의 노래를 들으면서 내려가면 꽤나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 폰엔 유령의 노래가 없다. 유투브로 틀까 하다가, 끊기는 버퍼링에 짜증만 가중 될 것 같아서 그냥 아무곡이나 랜덤으로 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플레이리스트를 돌리다 보니 루카스 그라함의 Drunk in the morning이 나온다. 뭔가 비와 술이 어울려서 인지 나도 모르게 그래 이노래야! 라고 생각하며 드렁크 인더레인을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저벅저벅 빗속을 걷는다. 
 
 말이 빗속이지 완전 폭풍속이다. 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헬러! 하고 인사한다. 야 니넨 망했어. 비 겁나오고 좋은 구경하긴 틀렸다! 라고 생각하며 혼자 흐흐흐흐 하고 웃는다. 역시 난 심보가 고약하다. 그렇게 몇곡을 들으며 오다보니 운동화에 물이 차기 시작한다. 통풍과 쿠션이 죽이는 나의 빨간 Ultra boost는 빗속에선 쥐약이다. 예수처럼 물위를 걷는 듯 하다. 이미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으니 물위를 걷기위한 노력은 앞으로 안하기로 결심한다. 점점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가방을 앞으로 매고 배를 따듯하게 한다. 팔다리가 얼어도 배와 코만 시리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코가 시리다. 코를 부여잡고 갈 순 없으니 그냥 한손은 주먹을 꽉 쥐고 한손은 우산을 꽉 쥔다. 손발이 따듯한건 이럴때 참 좋다. 뒤에서 팍팍팍팍 달려오는 소리가 난다. 이대로 조난당하는게 걱정돼서인지 얼른 하산하기 위해 달리나보다. 그러다 발목뼈가 튀어나오면 좀 후회가 될것이다. 난 나름 똘똘한척 한걸음 한걸음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간다. 
 
 그러고 보니 산에 널려있던 소들이 안보인다. 그리고 쩌렁쩌렁 울리던 방울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갑자기 비가오면 얘네들은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곧 그 궁금증은 해결됐다. 다들 나름의 처마밑에 몰려들어 비를 피한다. 그 중에는 처음보는 산양도 있다. 처마밑에 꼼짝않고 서서 비를 구경하며 오돌오돌 떨고 있다. 나도 저 옆에서 같이 오돌오돌 떨고 있다가 먹던 쪼꼬바를 나눠주면 산양이 나를 친구로 알아주겠지? 뭐 물론 그건 쪼꼬바가 꽤나 많이 남았을 때 이야기다. 만일의 사태에 대해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따지다 보니, 다시 First가 보인다. 결승지점을 눈앞에 둔 마라토너가 된 기분이다. 자신있게 골인 한 뒤 기계적으로 레스토랑으로 올라간다. 30,000원이든 35,000원이든 따순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의지이다. 그런데 정말 사람이 너무 꽉 차있다. 추운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시장골목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다. 어차피 날이 궂은 상대라 First의 바로 아래까지 내려가는 글라이딩이나 짚라인을 탈수도 없으니, 그냥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서 비교적 사람이 없는 레스토랑에 가자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전은 멋지게 적중한다. 
 
##7. 슈니첼
 난 돈까스를 좋아한다. 그런데 유럽엔 돈까스가 유명하단다. 하지만 한번도 유럽 돈까스를 못먹어봤다. 그런데 여기 돈까스를 파네. 35,000원이다... 그래 뭐 앞으로 비가 그칠때까지, 양말과 깔창이 마를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그냥주문 하기로 한다. 맛은 뭐 괜찮다. 감자튀김도 뭐 왕창준다. 꾸역꾸역 먹는다. 콜라도 시킬까 하다가 6천원이어서 그냥 포기한다. 콜라보단 침이 몸에 좋다. 이런 자기합리화를 하다보니 음식이 먹을 만 하다. 음식을 다 먹고 커피도 한잔 시킨다. 생각보다 커피가 맛있다. 그러고 보니 커피도 6천원이다. 뭔가 한국과 커피는 비슷한 가격이다 보니 이득인 기분이다. 식사를 마치고 양말을 신어보니 아직도 날 예수로 만들어 준다. 이 예수양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뭐해서 체온으로 탈예수화에 노력한다. 물장구치기를 어느정도 하다보니 이제 육지를 걷는듯 하다. 깔창을 넣고 다시 Ultra boost를 장착하니 다시 예수가 된다. 그래 그냥 오늘은 예수로 살자. 비가 좀 잦아든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곤돌라에 올라탄다. 그리고 라우터브로넨으로 향한다. 
 
##8. 퐁듀
라우터브로넨에서 옆팀 대리님을 만났다. 우연하게 이번에 스위스여행 일자가 하루 겹치게 됐다. 뭐 이런게 된 김에 퐁듀나 같이 먹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퐁듀는 보통 겨울에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며 함께 먹는 음식이라 혼자서는 잘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스위스에 왔는데 퐁듀는 한번 먹어보고 싶네-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퐁듀는 이름 그대로 감자나 빵을 녹인 치즈에 퐁퐁 넣어서 마늘, 양파등에 듀듀 간을 한 다음 먹는 음식이다. 샤브샤브를 샵샵 적셔 먹는 느낌이랄까.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수분이 날아가고 치즈가 점점 짜진다. 샤브샤브면 육수를 더 부어달라고 하겠는데, 여긴 무조건 한 3만원 더 내라고 할것 같았다. 자연스레 트레킹을 하면서 길가에서 들이키던 에비앙이 생각났다. 퐁듀를 먹으며 맥주도 한잔하고 아이스크림까지 먹다보니 배가 꽤나 불러왔다. 그래도 이정도면 스위스음식 좀 먹어봤다고 떵떵거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또 찾아 먹을것 같진 않다. 하지만 나중에 캠핑이나 가게 되면 오뚜기 옥수수스프에 식빵을 찍어먹으며, 내가말이야! 전에 스위스에 갔는데 말이야! 크~~~~~~~~~~~~ 여특 죽여줬어. 이런 이야기 거리가 늘었다고 위안을 삼았다. 
 
##9. 인터라켄의 끝
드디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던 인터라켄의 일정이 끝났다. 비록 오늘 날씨가 흐렸지만 덕분에 말도 안되는 무지개를 봤으니 만족스럽다. 문제는 내일 체르마트의 일정인데, 오늘처럼 빗속에서도 멋진 풍경을 볼 수 있길 바란다.